PRODUCER'S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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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의 정체를 알고 나면 달라지는 것들 WITH THE PASSION! REAL PASSION!
  • 인데이
  • 작성일 : 2017.06.20 :
  • 조회 수 : 1272


 

2006년 11월부터 2016년 10월 말일까지 나는 꼬박 10년을 두 곳의 케이블 방송사에서 일을 했다. 숱하게 들고나는 미디어 업계, 그 중에서도 케이블이라는 매체는 참으로 다이내믹했다. 직접 드라마를 제작하려는 시도 자체가 미친 발상으로 치부되던 시절에서 지상파를 능가하는 이슈를 일으키는 지금의 상황이 되기까지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와도 같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도도한 흐름에 취하기에는 아직 나는 일개 작은 개인일 뿐이었다. 창작하는 예술가도 아니고 사업을 주도하는 자본가도 아닌 큰 회사에 다니는 작은 자. 40이라는 많지도 어리지도 않은 나이에 ‘어떻게 살아야 무언가를 남기고 죽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마침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 여러 솔깃한 제안이 쏟아졌다. 귀가 얇아짐을 느꼈다. 다 뒤로하고 오랜 숙원이었던 미국 서부 여행을 떠났다. 지구라는 행성에 사는 먼지 같은 존재임을 실감하던 사막위에서 지난 10년 사이 누린 보람과 영광을 뒤로하고 직접 프로덕션을 창업하기로 마음먹었다.


6개월 후인 지금, 정신을 차려보니 CJ OCN과 넷플릭스라는 거대 스튜디오와 드라마 제작 계약이 성사되었고, 내게는 과분한 20여명의 동지가 생겼으며 10여명의 아티스트들이 고락을 함께하는 회사의 형태가 되었다. 기적 같은 행운만큼 몇 건의 큰 수업료도 치러가며 예전이라면 감당 못했을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모르는 번호의 전화 너머로 셀러브리티의 목소리를 듣는 횟수만큼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뒷담화도 동시에 들려온다. 사람을 다시 보게 되었다. 사람에 대한 기대를 접는 횟수가 많아졌다. 체력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었으며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게 되었다.


창업 이후 처음으로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경북콘텐츠코리아랩에서 본 지면을 허락해주심을 계기로 정리해본다. 이번호의 주제가 ‘열정’이라고 했다. 자타공인 열정의 아이콘인지라 자신있게 처음 한페이지를 가득히 열정 어쩌고 썼다가 다 지웠다. 잠잘 시간도 없는 주제에 흔쾌히 원고를 수락한 내 객기를 여전히 열정과 혼동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마무리를 하려다 후배 창작자들에게 만큼은 부끄럽고 싶지않아 다시 졸필을 이어가 본다.

20여년 사회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과 여러 상황을 겪으며 내가 확실히 터득한 것은 남의 역량이나 명성을 막연히 믿었다가는 꼭 그만큼 사고가 난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나는 언제나 상대가 기대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줘야 겨우 본전이라도 찾을 수 있다는 불공평한 현실은 변함없었고. 힘들지만 하루하루 그 간극을 채울 수 있었던 것은 ‘열정’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열정’으로 보이는 그 태도 속 성분은 달랐었다. 여러가지의 결핍, 열등감, 욕심, 절박함 그리고 약간의 집착. 그 모든 것들에 사로잡힌 것도 모르고 ‘노오력’하는 캐릭터로 스스로를 규정한 것이다. 그렇게나마 열의가 습관이 되면서 일희일비하는 삶이 꽤 오래 유지됐다.


내가 가진 그런 열정의 성분을 창업하고 나서야 알았다. 날 방어해 주는 줄 알았던 여러 보호막없이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지금은 순도 100% 열정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음을 느낀다. 마치 사막에서 전갈을 찾는 여우처럼 모든 감각을 집중해서 살아내려는 의지. 동시에 그 에너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먼저 지쳐서 쓰러질 것이라는 긴장감. 남발하면 열정이 아니라 객기이고 나와 내가 하려는 이야기들을 공허하게 날린다. 이야기의 허술함은 현장에서 혼선을 빚는 것은 물론 큰 비용을 치르고도 관객에게 감동을 줄 수 없을 것이다.


콘텐츠업계에서 일하는 혹은 일하고자 하는 사람이 이 글을 보고 물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열정을 버리라는 말이냐고. 어차피 모든 창작이 무모한 열정없이 가능하냐고.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각자의 열정의 정체를 파악함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이후에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집중하라는 것이다. 그저 그런 창작자를 위한 조언이 아니다. 최상급 크리에이터가 되고자하는 이들을 위함이다. 내가 만난 업계 프로페셔널들은 모두 미친 사람들이다. 자기 열정의 정체를 알고 몰두할 줄 아는 이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새삼 알게 된 것이다.


우리 제작진들은 이번 여름 OCN을 통해 ‘구해줘’라는 드라마를 보여주기 위해 한창 촬영 중이다. 기획과정에서 내가 가졌던 결핍이나 열등감이 긍정적으로 반영되었다. 캐릭터의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갈등을 풀어가는 아이디어로 작가가 반영해 주었다. 이런 에너지들은 전염성이 강해서 연속해서 캐스팅 라인업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내년에 선보일 넷플릭스의 ‘좋아하면 울리는’은 10여명의 창작자들이 함께 팀웍을 이뤄 극을 집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쾌감의 순간은 캐릭터와 이야기에 대한 주장이 부딪히고 깨진 끝에 더 큰 정체를 만나게 될 때이다.


‘진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것 자체가 위대한 도전이 되는 이유는 서로를 채워주는 선순환 구조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 처음은 나부터 내 심연에 귀 기울이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면 막연한 열정을 가진 사람을 가려내 피하게 될 것이다. 이후엔 전보다 더 재미있는 작업을 하고있는 당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반드시.